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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어송라이터 유재하의 알려지지 않은 대학 시절 친구의 이야기

by Daniel_Kevin 2022.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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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하는 단 한 개의 앨범만 남기고 세상을 떴지만, 천재적인 싱어송 라이터로 우리의 기억에 영원히 남아 있다. 가수 김동률이 유재하의 죽음으로 한국 발라드 음악이 100년은 퇴보했다고 표현할 정도이다.

 

그에 대해 알려진 이야기는 어느 정도 있지만,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조금이라도 더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면 참 귀하고 소중한 정보가 된다. 그런데 한 유튜브 채널에서 그의 대학시절 친구였던 다른 뮤지션이 남긴 장문의 댓글에서, 대학시절 유재하 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글이 언제 삭제될거나 영상이 언제 내려갈지 모르므로, 박제하기 위해 가져와 본다. 

 

싱어송라이터 유재하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고 있다.
유재하

 

워낙 독특한 친구라서 아직까지도 생각 나는 일화도 많으네요.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겠습니다.

재하는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들 사이에서 기타를 잘 치는 친구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이미 Jeff Beck의 곡을 연주한다고 소문이 났었으니까요. (나중에 그의 집에 놀러 갔다가 Jeff Beck의 'Cause we've ended as lovers"를 연주하는 걸 들을 기회가 있었으니, 그 소문은 사실이었던 겁니다.)저도 고등학교 때부터 베이스기타를 쳤었는데, 대학에 들어가자 그와 저를 다 아는 한 친구가 서로 알고 지내면 좋을 것이라서 재하와 저를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알게 된 것이죠. 

당시 저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며 형과 형 친구들이 모여 만든 밴드에서 같이 활동도 하고 있었고, 재하는 한양대 음대 작곡과에 진학하여 클래식 음악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뮤지션이 되겠다는 확고한 뜻을 이미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음악 이론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음대에 진학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학교도 다르고 서로 바빴기에 자주 만났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두 달에 한 번 쯤은 만나서 같이 연주도 하고 노래도 하면서 놀았었습니다. 그가 우리 집이나 밴드 연습장으로 올 때도 있었고, 제가 그 친구의 집으로 갈 때도 있었죠.

걔네가 동숭동의 더 큰 집으로 이사가기 전, 삼선교의 한옥 집에서 살 던 어느 여름날 놀러 가보니 피아노를 치는 다른 친구가 와 있더군요. 그는 들국화의 허성욱이었습니다. 그날 셋이서 Walter Murphy의 "the Fifth of Beethoven"과 "여왕벌의 비행"을 연주하고 놀았었는데, 다들 워낙 실력이 좋으니 처음 연주해 보는 것인데도 꽤 사운드가 잘 나오더군요. 허성욱이 그 친구도 요절했으니, 결국 그날의 셋 중에 지금 남은 건 저 하나 뿐이네요. 아까운 재능들입니다.

그런 식으로 역시 동갑이었고 당시 고려대를 다니고 있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김종진이도 공통의 친구에게서 소개를 받아 알게 됐었는데, 제가 그 친구를 재하에게 소개해서 같이 잼도 하고 그랬던 기억도 납니다. 사실 음악을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시절이라, 한 두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 식으로 알게 된 뮤지션들이 그 이후로도 사실 꽤 많았으니까요.

한 번은(대학 3학년 때였던 것 같습니다) 재하가 자기네 학교 축제에서 밴드를 만들어 공연을 할 것이니 와서 베이스를 좀 쳐달라고 부탁을 했었습니다. 저도 그 때는 활동하던 밴드가 해산돼서 좀이 쑤셨던 때라, 흔쾌히 오케이 했었죠. 연습하러 가 보니 멤버들은 저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양대 음대생들이었는데, 드럼은 퍼커션 전공, 건반은 피아노 전공, 보컬은 성악 전공, 그런 식이었었죠. 
재하가 오랜만에 기타를 잡았구요. 나머지 멤버들은 재하가 악보를 그려 주면 그걸 보고 연주했었습니다. 물론 저는 옛날 딴따라 방식으로, 그냥 귀로 듣고 따서 연주했었구요. 한 번 맞춰 보고 바로 축제에서 연주를 했는데, 밴드는 의외로 꽤 괜찮았던 기억이 납니다. "Eye of the Tiger" 같은 당시의 히트 팝송들을 몇 곡 연주했었고, 2부 순서로는 재하가 섭외해 온 가수 이문세씨(재하와는 호형호제하는 사이였습니다)가 노래를 하고 우리는 반주를 했었죠.

그러다가 저는 유학 길에 오르게 됐는데, 이후로는 방학 때 한국에 나와 잠깐 재하를 만났고, 그게 마지막 만남이 됐네요. 그 때 재하는 "사랑하기 때문에" 앨범의 녹음을 마치고 믹싱 단계에 있었는데, 가 mix된 곡들을 그 때 처음 들었습니다. 역시 좋더군요. 재하는 "니가 미국 안 갔으면 베이스는 니가 쳤을 텐데"라고 했고, 저도 그건 아쉽게 생각했었습니다. 당시 세션맨으로 유명했던 분이 베이스를 쳤지만, 그 분들은 녹음 당일 날 와서 악보 보고 초견으로 연주를 하는 것이니, 아무래도 같이 고민하면서 음악을 만들고 베이스라인도 가다듬을 수 있는 친구와 같지는 않았겠죠.

그런데 그 날 재하가 했던 말 중에서, 잊을 수 없는 말이 있었습니다. 참 미국 가기 전에 저는 바이얼린을 전공하던 음대생과 약 1년 반 정도 연애를 하다가 갔는데, 재하도 저와 함께 그 아가씨를 몇 번 같이 만나서 밥도 먹었고, 둘 다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들이라 그랬는지 어느 정도 친해지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날 오랜만에 만나게 되니 안부를 묻더군요. 사실 저는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에 헤어지고 갔기 때문에, 그렇게 말해 줬습니다. 그랬더니 재하가 갑자기 정색을 하면서, "너 인생 그렇게 살면 안된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처음엔 농담인가 해서 재하의 얼굴을 봤는데, 보니 농담이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말하는 거였어요. 그러니까 재하는 한 인생에서 진정한 사랑은 한 명 뿐이어야 하는 거고, 한 번 사랑했으면 끝까지 가는 거지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그러는게 아니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거였어요.

제가 위에서 이런 저런 사소한 얘기들을 했지만, 사실은 이 마지막 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 배경을 조금 소개한 것 뿐입니다. 재하는 그런 친구였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아시는 그의 가사에 적힌 말들은, 그냥 노래를 만들기 위해서 대충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정말 다 진심인 거예요. 아마도 그래서 그렇게 아름다운 곡들을 쓸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정도로 순수한 영혼은, 이 세상에 오래 머물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닌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구요...

오랜만에 엣 생각을 하니 이런 저런 생각들이 줄을 잇습니다만, 이쯤에서 줄이겠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음악을 취미로만 해왔습니다만, 언제고 그의 곡을 한 번 다시 녹음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재하는 저한테, "우리가 같이 음악을 하면 서로 노래를 한다고 싸울 거다"라고 했었는데 (재하의 말은 대개 맞으니 아마 그건 그랬겠죠 ㅎㅎ),이젠 싸울 일도 없을 뿐더러, 제가 노래를 부른다고 하면 싸우긴 커녕 저승에서나마 좋아해 줄 것 같거든요. 제가 부르고 싶은 곡은 "그대 내 품에"입니다. 

용인 천주교 묘지에 있는 그의 무덤에 가 보시면, 무덤을 둘러싼 묘지석에 악보가 한 줄 새겨져 있습니다. 바로 "그대 내 품에"의 한 소절인데요, "살며시 피어나는 아지랑이 되어..." 부분입니다. 그 곡을 아시는 분은, 그 가사와 단순한 멜로디가 정말 얼마나 아름다운지, 잘 음미해 보세요. 정말 눈물처럼 영롱합니다. 
많은 곡중에 그 곡의 그 부분을 잘라서 무덤에 새긴 것은 재하가 사랑했던 바로 그 아가씨였겠죠? 아마도 그럴 거라 생각하는데, 유학 길에서 돌아와 재하 부모님과 그 아가씨와 함께 재하의 무덤을 찾았던 날, 그걸 묻지 않았던 게 아쉽네요.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재하가, 그 노래들을 들려주면서, "야, 나 가사도 잘 쓰지 않냐?" 했던 것이 기억 납니다. 그 때 제대로 대답을 해주지 못했어요. 진짜 잘 쓴다고. 그리고, 그런 식으로 말을 해도 하나도 밉지 않은 건 너 밖에 없을 거라고.

그 외에 유재하님의 많은 이야기는 나무위키에서도 더 보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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